인상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 4 가지 요인

이곳은 파리 몽마르트 근처의 바티뇰이라는 지역에 있는 한 화실입니다. 그림에서는 잘 차려 입은 신사들이 모여 한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또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는 왜 이런 시범을 보이고 있는 걸까요?

인상주의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하게 되는 <바티뇰 화실>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에는 너무도 유명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Eduard Manet, 1832~1883)입니다. 그는 동료 화가이자 평론가인 아스트뤽의 초상을 그리며 시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뒤로 화가로는 숄데러, 르누아르, 바지유, 모네가 보입니다. 키 큰 바지유와 마주 선 졸라와 수집가 메트르도 보입니다. 르누아르는 마치 사각 액자 프레임에 담긴 그림속 인물처럼 보이는데 마네가 그리는 붓질을 조금이라도 놓칠까 그야말로 몰입한 상태로 지켜보며 서 있습니다. 마네가 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마네, 인상주의 화가들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

인상주의 화가들의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는 마네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마네가 미치도록 매료된 화가가 있었으니 벨라스케스와 할스가 바로 그들입니다. <악의 꽃>을 쓴 작가 ‘보들레르’의 영향으로 마네는 아카데미를 나오게 됩니다. 데생만 반복해 그리며 고전 예술을 가르치는 아카데미를 박차고 나와 루브르 거장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며 그림을 배운 마네는 그 뒤 해외를 돌아다니며 여러 미술 작품을 직접 접하게 됩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는 할스의 작품을 보고 많은 영감을 얻었고, 스페인에서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마침 <올랭피아>에 쏟아진 비난과 모욕으로 좌절했던 시기에 마드리드로 도피성 여행을 떠났던 마네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토록 보고 싶었던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는 작품을 직접 접한 뒤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이 옳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얻었던 것입니다.

인상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풍경화의 유행

마네를 따랐던 젊은 화가들 중에는 풍경을 그리는 화가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는 물론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등 모두 풍경화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바르비종파 화가들, 즉 프랑수아 밀레나 카미유 코로처럼 성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바르비종파에게서 가져온 개념이 있었습니다. 바로 ‘외광 회화’ 라는 것이었습니다. ‘외광 회화’는  종전의 작업 방식처럼 작업실에서 그려진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햇살을 받으며 아뜰리에 밖에서 그리는 그림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바르비종파 화가들은 용어만 ‘외광 회화’였습니다. 실제로는 밖에서 스케치만 한 뒤 대부분은 실내에서 그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림을 그리는데 제약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상주의 그룹의 젊은 풍경화가들은 모네의 주도하에 실제로 밖에서 그림을 그렸고 가능하면 현장에서 완성하는 것은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라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림을 계속해서 무한정 그릴 수 없고 바로 해 떨어지기 전까지 그릴 수 있었습니다. 길어야 반나절이면 마무리 작업을 해야 했으니 그만큼 빨리 그려야 했고 이들에게는 해결책이 필요했습니다.

외광회화의 열쇠, 알라 프리마 기법

딱 맞는 해결책이 되어준 것이 바로 ‘알라 프리마’ 기법이었습니다. ‘알라 프리마(Alla Prima)’ 는 ‘단번에 그리다’라는 뜻을 가진 그림 기법을 일컬는 단어입니다. 먼저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물감을 칠해가며 완성하므로 빠른 속도로 그리는 기법입니다. 알라 프리마 기법은 마네가 깊이 연구한 회화 기법입니다.  마네는 벨라스케스와 할스에게서 배운 알라 프리마 기법이 틀에 박힌 고전미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따르는 젊은 후배들에게 열심히 그 기법을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감상한 <바티뇰의 화실>은 마네가 ‘알라 프리마’ 기법을 후배들에게 알려 주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알라 프리마가 인상주의 ‘외광 회화’를  가능하게 한 이면에는 또 다른 기술과 산업의 발전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인공안료의 개발과 튜브형 물감

당시 서양에서는 화학 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공 안료가 경쟁적으로 개발되었습니다. 불과 한 두 세대도 지나지 않아 모든 색상의 안료가 만들어 졌습니다. 또한 오일과 혼합된 ‘튜브형 물감’이 만들어지고 곧 이어 대량생산이 이뤄졌습니다. 인상주의 시대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매우 비싼 안료를 직접 사다가 직접 물감을 제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튜브형 물감은 화가들에게는 너무나 편리한 발명품이었습니다. 튜브에 물감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어디든 물감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튜브형 물감 또 하나의 가능성이 열었습니다.  그것은 제대로 된 외광 회화가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스케치만 하고 돌아와 작업실에서 채색을 하며 마무리 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해 채색, 마무리, 완성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철도의 발명

그 무렵 또 하나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철도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철도는 ‘엄청난 속도로’ 공간의 제약을 없애버렸습니다. 화가들은 철도를 이용하여 풍경을 그리기 위해 가고 싶던 장소를 마음껏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로 선택한 현장은 센 강변의 휴양지나 저 멀리 노르망디 바닷가였습니다. 기차가 없었다면 이러한 장소를 찾아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무리

  • 풍경화의 유행,
  • 알라 프리마 기법의 전수,
  • 튜브형 물감
  • 기차의 발명

이 네 가지를 꼭 기억해 주세요. 인상주의를 낳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시대적 요인들 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인상주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아마 힘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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